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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로맨스?" 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봐, 역시 너 뭔가를 착각하는 것 같아. 침낭 쑤셔 넣고 터부룩한 수염으로 헤매고 다니는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로맨스 같은 걸 만들 수 있어?"
"매번 혼자서 여행해?"
"그런 셈이지."
"고독한 게 좋아?" 그녀는 턱을 괸 채 물었다.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밥 먹고 강의도 혼자서 뚝 떨어져 앉아 듣는 게 좋아?"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
그녀는 선글라스 다리를 입에 물고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은 없어. 실망하는 게 싫을 뿐이야." 그녀는 되뇌었다. "만일 네가 자서전 같은 걸 쓴다면 이 대사 써먹도록 해."
"고마워."
"녹색 좋아해?" 그녀가 물었다.
"그건 또 왜?"
"녹색 폴로셔츠를 입었으니까. 그래서 녹색 좋아하는지를 물어본거야."
"딱히 좋아하는 건 아냐. 무슨 색이든 아무 상관없어."
"딱히 좋아하는 건 아냐. 무슨 색이든 아무 상관없어." 그녀는 또 내 말을 따라 했다. "난 네 말투, 진짜 좋아. 벽에다 흙을 깨끗하게 바르는 것 같은 느낌이야. 지금까지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어, 다른 사람한테서?"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말은 오묘하다. 하는 말만 들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의 척도가 대충 선다. 말이 예쁘다는 칭찬은 제법 듣기에 좋다. 좋고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해줄 때가 있다. 고민에 대해 상담을 해주기도 하고 다독여주기도 하는데, 스스로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꾸짖는 일이 잦다. 꼭 그럴 필요 없는데. 어쨌든 말을 예쁘게 한다고 하는 칭찬은 듣기에 좋다.
'그러나 오랜만에 그런 풍경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제각기 행복한 듯이 보였다. 그들이 정말로 행복한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9월 말 기분 좋은 한나절에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고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더 외로움에 젖었다. 나 혼자만이 그 풍경 속에서 멀리 떨어진 것 같았다.'
-머리털이 많이 빠졌던 2014년의 가을과 그 해 겨울에 일어난 일까지, 참 힘들었고 나도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나 하고 많이 괴로웠는데, 이 때 엄마는 '삶은 받아들임의 연속'이라는 말을 해줬다. 그게 참 크게 다가왔다. 엄마는 정말 대단하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엄마에게 더 좋은 아들이 되야 하는데 그러지 못 해 아쉽다.
'그렇지만 그거, 정말로 괴로웠어. 마치 내 인생 자체가 그냥 끝나 버린 것 같았으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이 고작 이십 년 정도로 끝나 버린거야. 정말 너무하지 않아? 모든 가능성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문득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없는 거야. 아무도 박수 쳐 주지 않고 아무도 떠받들어 주지 않고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고, 집에서 하루하루를 이웃 아이들에게 바이엘이니 소나티네 같은걸 가르칠 따름이야.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해서 툭하면 울고 그랬어. 너무 억울해서 누가 봐도 나보다 재능이 떨어지는 애가 어느 콩쿠르에서 2등을 했다는 둥, 어느 홀에서 개인 연주회를 했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너무 억울하고 처량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
-취직하고 나서 돈을 버는건 참 좋은데, 안 좋은 일 중 하나는, 이젠 내 삶의 길이 한 방향으로 정해졌다는 느낌이다. 공부할 때는 그래도 뭐든 될 수 있지 싶고, 많은 가능성이 보였는데. 이제는 그냥 이 회사의 직원 혹은 간부로 살아가는 길 외에 다른 길은 뭐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또 다르다. 생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고 작게 바뀌기 마련이다. 우리 누나는 32살에 혈혈단신으로 미국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난 지금 겨우 26살이고, 돈도 적지 않게 벌고 있으니 참 좋은 조건이다. 우리 가족은 대체로 능숙하지 못 한 일이 참 많은데, 딱 하나 장점을 내세우자면 끈기. 그러니까 아주 독하다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뭐든 될 수 있다. 응립여수 호행사병이라.
'언제나 자신을 바꿔 보려고 나아져 보려고 하다가 잘 안 되면 안절부절 못하거나 슬퍼하거나 했어. 그렇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자질이 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스스로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저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바꾸어야 하고, 그런 생각만 했던 거야.'
-스스로를 많이 바꾸려 했다 나도. 근데 참 나답지 않게 된다는게 힘든 일이다. 정말 어렵다. 지금의 나도 많이 안절부절하고 슬퍼한다. 저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바꾸어야 하고 그런 일이 많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이 될것같은데, 이대로는 괴리감에 너무 힘들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많은 부분을 해결해줄 것이긴 해.
"편지에 썼지?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난 더 심각하게 아프고, 뿌리도 아주 깊어. 그러니까 만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너 혼자라도 가줘. 날 기다리지 말고. 다른 여자애랑 자고 싶으면 자고. 내 생각 하면서 망설이거나 하지 말고 당당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니면 난 너까지 끌고 갈지도 몰라. 설령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그런 짓만은 하기 싫어. 네 인생을 가로막고 싶지 않아. 누구의 인생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아까도 말했듯이 가끔 만나러 와 주고, 나를 언제까지나 기억해 줘. 내가 바라는건 그것뿐이야."
"내가 바라는 것은 그뿐만이 아냐."
"하지만 나랑 같이 있으면 네 인생을 허비하게 돼."
"난 아무것도 허비하는 게 아냐."
-난 아무것도 허비하는 게 아냐. 이 말이 참 좋게 읽혀졌다. 난 아무것도 허비하는 게 아냐. 그럴 수 밖에.
"설마요.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이해 안 해 줘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은 상대도 있는걸요. 다만 그 외 다른 사람한테는 별로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체념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가사와 선배가 말하듯이 아무한테도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자신을 동정하지 마.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뭐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찌 됐든 자신을 동정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느껴지긴 한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오로지 홀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하루 그것만 붙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맞는 말이다. 백번 옳은 말씀이다. 이번에 뭔가를 배운다 해도, 다음의 일에 대비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쉽게 얘기하지 말아야겠다. 나는 아직 경험이 많이 부족하지만 이 부분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란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 정말 많다.뭐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다. 다들 행복하세요.